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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 2017.10.17 화 12:47
정치입문과 단상
  • 1989년 4월, 그러니까 1987년 12월 대선에서 민주화세력의 집권을 이룩해내지 못하고 군사독재 정권이 연장되고 있던 때 저는 평범했던 은행생활을 접고 국회의원 보좌관이라는 그 시절로서는 대단히 생소한 영역에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제가 그 당시 정치권에 몸담게 된 것은 정치할 욕심에서가 아니었고 순전히 단조로운 은행생활에 회의를 느낀 나머지 (이 표현이 현재 은행업무에 정진하고 있는 많은 은행원들께 누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무언가 돌파구를 찾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평민당의 배기선 선배(현 열린우리당 의원, 국회문광위원장)가 당 기획조정실의 전문위원을 뽑는다고 하기에 찾아갔다가 배기선 선배는 만나지 못하고 우연히 대변인실에서 대변인 성명서를 작성하는 장면을 목격하였는데, 서너 사람이 모여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불과 4~5분 만에 성명서가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까.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은행에서 일할 때는 총재까지 최종결재를 받는데 보름 또는 그 이상이 걸리는 경우가 많아 답답했었는데 말입니다. ‘비록 야당이긴 하지만 나의 노력이 국정운영에 반영될 수 있다면 참으로 보람을 찾을 수 있겠구나’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은행원 봉급보다 훨씬 적은 활동비에라도 당 전문위원으로 일할 결심을 굳히니, 배기선 선배로부터 당에 예산이 없어 전문위원 선발을 백지화했다면서 마침 권노갑 의원이 보좌관을 구하고 있으니 이에 응해보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저는 이때까지만 해도 정치에는 문외한이어서 권노갑 의원이 김대중 총재와 함께 오랫동안 민주화운동을 해온 분으로만 알고 있었을 뿐 그분의 나이나 학력, 경력, 출신지역 등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국회의원 보좌관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알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하여 저는 59세에 초선이 된 권노갑 의원의 정책보좌관(4급)으로 새로운 정치인생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 이후 저의 정치역정은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제가 정치에 입문한 1989년 그 해에 서경원의원 밀입북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전까지만 해도 노태우 대통령은 4당 체제하에서 야당에 유화 제스처를 쓰고 있었는데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정국은 또다시 공포의 공안정국으로 회귀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김대중 평민당 총재가 안기부의 조사를 받는 등 당시 여권은 공안정국을 이용해 여소야대 체제를 깨뜨리려고 안간힘을 썼고, 이는 결국 이듬해 내각제를 매개로 평민당과 호남을 배제하고 영남과 충청지역이 연합하는 천인공노할 3당 합당으로 이어졌습니다.

    정치를 시작하자마자 공안정국과 3당 야합으로 이어진 정치상황은 모든 것을 4당 체제 이전의 과거로 되돌려 놓았습니다. 5공의 속죄양이 된 정호용 의원이 백주에 고속도로 상에서 경찰의 제지를 받는가 하면, 안기부는 이철용 의원이 탄 비행기를 김포공항 상공에서 30분동안 배회 시키는 등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고 불법 도청이 자행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 이다보니 당연히 야당생활은 무척이나 고되고 힘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힘든 와중에서도 저는 국방위원 보좌관으로 당시 정국을 뒤흔든 대형사건을 잇따라 터뜨렸고 매스컴의 1면을 장식하는 쾌거를 여러 번 경험했습니다. 당시 보안사 윤석양 이병의 양심선언을 파헤쳐 보안사의 명칭이 기무사로 변경되었고, 기무사령관의 계급이 중장에서 소장으로 조정 되는 등 기무사의 기구 축소로 이어졌습니다. 또한 성역으로 인식된 안기부의 천문학적 예산 규모를 파헤쳐 불법적인 인권유린과 예산유용을 막는데 일익을 담당 했으며, 한국형 전차인 K1 탱크의 포수 조준경과 엔진에 대한 지적은 곧바로 성능 개량으로 이어지는 성과를 올렸고, CH-47D 헬기 도입에 따른 거액 커미션 제공 사건은 이후 수조원에 이르는 각종 무기 체계 도입 과정에서 투명성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3당 야합은 민주주의의 양대 기둥의 하나인 지방자치제에 대한 부정으로 나타나, 당시 민자당은 국회 3분의 2 의석을 무기로 4당 체제에서 합의한 지방자치 선거일정을 무기한 연기시키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결국 평민당 김대중 총재가 죽음을 각오한 20여 일간의 단식 투쟁을 벌인 끝에 마침내 1991년 3월 기초의원 선거, 6월 광역의원 선거를 이끌어 냈습니다.

  • 저는 이때 서울시 노원구에서 서울시의원 선거에 출마 했는데, 당시 선거는 정치권 주변의 알만한 사람들은 모두 아는 대로 사상 유례없는 금권 타락선거였습니다.
    선거 결과는 호남지역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야당인 평민당(신민당)의 대패로 끝났습니다. 이 땅에 진정한 민주주의의 토대를 만들기 위해 단식 투쟁까지 벌여가며 지자제를 있게 만든 평민당이었건만, 막상 선거에서는 처절한 패배를 기록하는 아이러니가 일어난 것입니다.

  • 지방선거 패배로 위기를 느낀 평민당(신민당)은 어떻게든 지역정당의 굴레를 벗기 위해 그 해 9월 이기택의 꼬마 민주당에 50:50이라는 파격적인 양보 속에 통합민주당을 출범시켰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92년 4월 통합민주당의 기치아래 14대 총선을 치루고 12월 14대 대선을 맞이했건만 김대중 후보는 또다시 분루를 삼키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 김대중 총재가 정계 은퇴 선언 후 영국 유학을 마치고 국내에서 체류하고 있던 1994년 4월 저는 과감히 야당 실세의원의 보좌관직을 내던지고 홀로서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때 저에게는 비로소 정치에 대한 신념과 철학이 움트고 있었고, 이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특정 의원에 매여 있는 보좌관직을 청산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저의 홀로서기는 민주당 정책위원회 법제사법전문위원 공채에 응하는 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법사전문위원 선발시험은 경쟁률이 8:1이었는데 저는 이 관문을 무사히 통과하면서 첫 번째 도전을 성공적으로 내디딘 것입니다.

  • 이후 현실정치에의 직접적인 도전은 1995년 지방선거에서 광산구청장 후보 선출을 위한 당내 경선에 응한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지구당 위원장의 입김이 그대로 작용한 열댓명 안팎의 소수 후보자 선정위원들의 투표에 의한 후보자 선출은, 처음부터 공정성과 투명성을 상실한 ‘무늬만 경선’일 뿐이었습니다. 1991년 서울시의원 선거에 이어 두 번째로 현실 정치의 높은 벽을 실감하게 된 것입니다.
    저는 이 사건을 계기로 지구당 위원장의 전횡과 독선을 제거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정치개혁의 시발이라 생각하고, 지방이 아닌 중앙 정치무대로 직접 진출해야겠다고 굳게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 1995년 9월 새정치국민회의가 창당되었고 이때 김대중 총재는 1997년 대선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1996년 15대 총선에서 당의 이미지 쇄신이 시급하다고 보고 자질과 능력면에서 문제가 있는 호남지역 출신 의원들을 물갈이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물갈이의 원칙과 기준으로 지역 여론조사를 제시했습니다.

  • 저는 이때 국회로 자리를 옮겨 지금은 고인이 된 신기하 원내총무에게 발탁되어 국회정책연구위원(2급)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여론조사에서 1위를 하기 위해 1996년 1월과 2월 두달간에 걸쳐 맹렬히 지역활동을 벌였고 그 결과 지역 여론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호남지역에 대한 전반적인 여론조사결과는 김대중 총재가 생각했던 것을 훨씬 뛰어넘는 전면적인 물갈이가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지역여론과 현실사이에서 고민하던 김대중 총재는 결국 처음의 결심을 바꾸어 3~4개 지역구를 개편하는데 그치고 말았습니다.

  • 저는 주변의 열렬한 권유를 받아들여 무소속 출마를 결심하게 됐습니다.
    저는 어차피 김대중 사람이고 선거결과에 관계없이 김대중 총재의 대통령 당선을 위해 일할 것이지만, 참된 정치를 지역구민들에게 직접 호소하고 싶어서였습니다.

  • 총선이 끝난 후 이제 김대중 총재에게 일생일대의 마지막 기회가 될 97년 대선을 맞이하여 저는 선거상황실 부실장으로서 당의 전산개표를 진두지휘 했습니다. 혹시 자행될지도 모를 개표 부정을 막기 위해서는 당이 직접 나서 개표과정을 확인하자는 취지였고, 또 우리가 이렇게 전산개표를 준비할 때 저들이 개표 부정 기도행위를 포기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 특히 선거상황실 부실장 재직시 김대중 후보의 CM송중 ‘아빠의 청춘’이 수록된 테이프와 관련된 소동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기만 합니다.
    아시다시피 ‘아빠의 청춘’이라는 노래는 “이 세상에 부모마음 다 같은 마음 아들딸이 잘되라고 행복하라고”로 시작됩니다. 그러나 이 노래를 개사한 당시 김대중 후보의 CM송은 듣기에 따라서는 지역감정을 자극한다는 오해를 사기에 충분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만약 이 테이프가 그대로 각 지구당으로 배포되고 상대후보측에서 문제제기를 할 경우 저희 당과 김대중 후보가 상당한 타격을 입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미 지구당에 배포된 테이프를 수거하기 위해 바삐 뛰었던 일들은 지금 생각해도 아슬아슬하기 그지 없습니다.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 1997년 12월 18일 마침내 역사적인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끌어 냈습니다. 평화적 정권교체에 미력하나마 저의 땀방울을 보탰다는 것에 저는 또한 벅찬 감격을 맛 보았습니다.

  • 이후 저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전문위원을 거쳐 김대중 대통령의 비서로서 청와대 정무수석실 국장을 거쳐 정무기획비서관으로 재직했습니다.
    국민의 정부 5년 동안 국정의 전 분야에 걸쳐 40여 부ㆍ처ㆍ청의 공무원들과 협의하면서 문제점을 파악하고 대책을 강구하는 등, 최고 통치권자를 보좌했던 경험은, 저에게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자산이 되었습니다.

  • 이제 저는 참된 정치가라는 저의 소중한 꿈을 향해 또다시 출발선에 섰습니다. 출발선에 서서 한가지 다짐을 굳게 합니다.
    저는 과거 정치의 유산인 조직을 통한 선거는 하지 않겠습니다. 조직선거는 필연적으로 금권선거를 부르고 금권선거는 부정ㆍ비리로 연결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저의 뜻에 동참하는 순수하고 열정적인 지지자들과 더불어 우리의 정치를 한 걸음 더 진전시키는데 기여하고 싶습니다.

  • 20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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